역사이야기

훈구파와 사림파

☆★☆★☆★. 2020. 8. 1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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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포스팅한 대로 세종의 둘째 아들 세조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단종을 물리치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 그리고 예종이 즉위했고.. 그 후로 예종이 죽은 다음날 당대의 실력자 한명회를 장인으로 둔 성종이 즉위하였다.

그는 1469년부터 1494년까지 조선을 통치하였으며 고작 13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그는 경연을 다시 부활시켰다. 홍문관을 설치하여 신하가 왕을 가르치는 경연을 만들어서 소통을 위주로 하는 임금이 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이 홍문관은 집현전을 계승한 것이다.

하지만 마냥 왕권이 약화된건 아니었다. 유교정치이념을 강화시키면서 1488년에는 유향소도 부활시켰다. 유향소는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확립하기 위함이었다.

불교를 폐단시키기 위해 억불정책을 내놨다. 세조 때 간경도감 설치했던걸 폐지하고 도첩제를 폐지하였다.

그는 자신을 위헙하는 세력이었던 훈구파를 지방의 사림 세력을 대거 중앙에 등용해서 그들을 견제했다.

훈구파는 세조 때 쿠데타를 통해 형성된 공신그룹이었다고 한다.

 

훈구와 사림 존재 논쟁

세조대 공신세력으로 급성장한 '훈구'와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 '사림'이 등장했는 데

사림은 성리학에 투철한 영남/기호지방에 중소지주였고 훈구파는 세조 집권 이후 공신으로 정치 실권을 세습하는 세력이었다.

사실 훈구파는 세조대 공신세력으로 급성장하여 큰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고 한다.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학풍과 사장을 중시해서 중앙집권적 통치와 부국강병을 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종의 즉위와 함께 억불정책을 내놓고 있던 그는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지방의 사림들을 등용했다. 사림들은 어떠한 부조리도 없었고 부끄러울 게 없었기에 훈구 대신들을 향해 정치는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자주적 사관을 갖고 있었고 대지주층이었던 성균관과 집현전 같은 관학을 통해 양성된 훈구파가 쉽게 물러설 리가 없었다. 그들은 성종이 죽은 뒤 대대적인 공세를 펴서 사림 대신들을 죽였다. 당시 김종직은 부관참시당했고 김일손은 능지 처사당했다. 이를 1498년에 일어난 조선 연산군 때 무오년에 일어난 무오사화라고 부르고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린 것을 구실로 훈구파가 사림파를 숙청하였다. 아예 능지 처사당했다. 조의제문은 세조의 왕권 찬탈 비판 기록이라고 한다.

사실 이게 조선 4대 사화로 불리는 데,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 기묘사화(1519), 을사사화(1545)로 나뉘어진다. 이에 대한 포스팅은 다음 포스팅에서 이어진다.

 

훈구와 사림의 존재는 뚜렷했나?

 

일단 역사학자들은 사림과 훈구는 뚜렷한 구분이 없다는 주장과 훈구와 사림의 존재는 뚜렷했다고 보는 주장으로 갈리고 있다고한다. 관학파 급진적 사대부의 후손인 훈구, 세조대 공신 세력으로 급성장한 훈구,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 등장한 사림.. 이 두 정치세력의 다툼 이후 16세기 사림정치가 등장했다고 보는 시각과 사림의 기반인 삼사의 출신을 분석했을 때 훈구와 일치했고 16세기 정치세력의 분열은 훈구와 사림의 대결구도가 아닌 대신과 대간의 대립구도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나는 훈구와 사림의 존재가 뚜렷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들은 서로 성격도 달랐고 그렇기에 훈구와 사림이 배립하여 무오사화가 발생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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